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 소의문 · 광희문 ·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주변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한양도성에는 한국 역사 전체가 아로새겨져 있다
한양도성에는 우리 역사 전체가 아로새겨져 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민족이 발전시켜 온 축성기법과 성곽구조를 계승하였으며,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처음 축조 당시의 모습은 물론이고 후에 보수하고 개축한 모습까지 간직하고 있어 성벽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문화유산이다. 한양도성이 처음 완공된 것은 약 620년 전이다. 태조 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 간, 이어서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 간, 모두 98일 동안 전국 백성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전체 공사구간(총 5만 9,500척)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이름 붙인 뒤 군현(郡縣)별로 할당하였다. 태조 때 처음 축성할 당시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쌓았으나, 세종 때 개축하면서 흙으로 쌓은 구간도 석성으로 바꾸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벽 일부가 무너져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 · 개축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비하였다. 성을 쌓을 때에는 일부 성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태조 · 세종 때에는 구간명 · 담당 군현명 등을 새겼고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 · 책임기술자 · 날짜 등을 명기하여 책임 소재를 밝혔다.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먼저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고,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어 1908년에는 평지의 성벽 대부분이 헐렸다. 성문도 온전하지 못하였다.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으며, 돈의문은 1915년에 건축 자재로 매각되었다. 광희문의 문루는 1915년에 붕괴되었고, 혜화문은 1928년에 문루가, 1938년에 성문과 성벽 일부가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 조선신궁과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주변 성벽을 헐어버리고 성돌을 석재로 썼다. 민간에서도 성벽에 인접하여 집을 지으며 성벽을 훼손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도로 · 주택 · 공공건물 · 학교 등을 지으면서 성벽이 훼손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한양도성의 중건은 1968년 1·21 사태 직후 숙정문 주변에서 시작되었고 1974년부터 전 구간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일단 훼손된 문화재를 완벽하게 회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 데에만 치중하여 오히려 주변 지형과 원 석재를 훼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울시는 한양도성의 역사성을 온전히 보존하여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전승하기 위해 2012년 9월 한양도성도감을 신설하고, 2013년 10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한양도성 보존 · 관리 · 활용 계획을 수립하였다.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70%, 총 13.1km(2016년 기준) 구간이 남아있거나 중건되었다. 숙정문 · 광희문 · 혜화문을 중건하였지만 광희문과 혜화문은 부득이하게 원래 자리가 아닌 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시민들의 지혜를 모아야 하며, 축성기술 등 무형의 자산을 제대로 발굴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남산 자유센터 건물 축대에서 ‘강자육백척’이라 새겨진 성돌이 발견되었다. 한양도성의 97개 구간 중 강(崗)자 구간 600척의 시작점이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이 각자성석의 원 위치는 알 수 없다. 자유센터를 지으면서 성벽을 헐어 그 석재를 축대 쌓는 데에 사용했기 때문이다.남산의 서북쪽 자락은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며 성벽을 헐어버린 구간이다. 2013년 발굴을 통해 땅에 묻혀있던 성벽의 일부(91m)를 발굴하였다. 태조 때 처음 쌓은 돌과 세종, 숙종 이후 보수하면서 쌓은 돌들이 켜켜이 모습을 드러내 한양도성 600년의 역사를 증언한다.
600여 년 간 서울의 울타리 역할을 한 한양도성은 도성민의 일상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보신각 종루에 매달린 큰 종을 쳐서 성문 여닫는 시각을 알렸는데, 새벽에는 33번, 저녁에는 28번을쳤다. 새벽에 치는 종을 바라(파루), 저녁에 치는 종을 인경(인정)이라 했는데, 민가의 대문도 이 종소리에 따라 열리고 닫혔으니 성문의 개폐 시각이 도성민의 생활 리듬을 지배한 셈이다.한양도성은 서울과 지방을 구분하는 경계선인 동시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이기도 하였다. 왕이든 백성이든 생을 마감하면 반드시 도성 밖에 묻혀야 했으니, 서울 사람들에게 도성은 삶의 증표와 같았다. 먼 곳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에게 한양도성은 반가움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몇날 며칠을 걸어서 온 이들이었으니 먼발치에서 한양도성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드디어 한양이구나’ 싶은 안도감이 생겼을 것이다. 특히나 과거시험을 보러 상경하는 선비들의 경우, 저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밤낮으로 책을 읽었으니 한양도성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과거 보러 온 선비들 중에는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며 급제를 비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도성민들에게도 전해져 ‘순성놀이’라는 놀이가 생겼다. 정조 때 학자인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순성놀이를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안팎의 멋진 경치를 구경하는 놀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의 아들인 유본예(1777∼1842년)도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봄여름이면 한양 사람들은 짝을 지어 성 둘레를 한 바퀴 돌며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고 적었다. 한양도성은 일차적으로 서울과 지방을 나누는 경계였으나 이 둘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 구실도 하였다. 도성 안에서는 채석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 쌓는 데 필요한 돌은 모두 성 밖에서 조달해야 하였다. 성벽은 비록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의 능선 위에 쌓였으나, 그 돌들은 북한산과 아차산 등지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한양도성은 이렇게 내사산과 외사산을 연결하고, 도성 안과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통합하였다.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도성방위체계를 완성하였다. 한양도성은 방어 시설로서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침 시에는 물론 내란 때에도 도성을 지키기 위한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었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은 도성을 버리고 힘없는 백성만 남아 고초를 겪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백성들 사이에는 “애써 성을 쌓아 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불평이 나올 만도 하였다. 영조 27년(1751) 9월 11일, 왕은 “도성을 지키는 것은 백성을 위한 일이다. 변란이 일어나면 내가 먼저 성 위에 올라 백성과 함께 싸우겠다.”는 내용의 수성윤음(守城綸音)을 반포하여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더불어 도성민들에게 각각 담당 구역을 정해주고 유사 시에는 무기를 들고 맡은 구역을 지키게 하였다. 도성민을 주체로 하는 도성방위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한양도성은 산성과 평지성을 함께 쌓는 고구려 이래의 축성 체계와 기법을 계승 발전시킨 성이다. 한양도성은 궁궐을 둘러싼 궁성, 도성을 보호하는 북한산성 · 남한산성과 짝을 이룬다.
한양도성은 처음 축조된 뒤에도 여러 차례 보수, 개축되었다. 성벽에는 이러한 개보수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군데군데 성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양도성은 그 자체로 현장 박물관 (On-Site Museum)이다.
도성의 유산가치
<유산개요>
•유산명칭 : 서울 한양도성(Seoul City Wall)
•위 치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산1-3외(종로구, 성북구, 중구, 용산구, 서대문구)
•분 류 : 문화유산 (사적 제10호)
•좌 표 : N37 59 31.45 / E126 97 31.24
1)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
서울 한양도성은 오백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도읍으로 궁궐, 관청, 종묘·사직과 도성 백성의 보호막으로 나라의 중심이자 도읍의 상징이 되었다. 한양도성은 고대 고구려 평양성과 고려 개성에서 보이는 평지성과 산성을 융합한 독창적 한국형 도성 제도를 계승하고, 동아시아 유교 질서와 상징체계를 반영한 계획도시이다. 1396년 전국 수십만 명을 동원하여 건설된 한양도성은 세종, 숙종 연간에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며 그 축성과정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성벽에는 시기별 축조기술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내사산의 능선과 평지를 아우르는 한양도성은 풍수지리 사상을 반영하여 지형과 조화롭게 건설되었으며, 도성 사람들의 놀이 장소이자 문학·회화·민속의 배경의 되어 왔다. 오늘날 한양도성은 천만 도시 서울이 품은 역사유적으로 자연 속의 도시경관과 도시 속의 역사경관이 조화를 이루며 600여 년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서울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 도심을 에워싸고 있는 도시규모의 성곽유산
서울 한양도성은 고려 고구려 도성 형식에 기원을 두고, 평양성과 개경도성의 연장선상에서 완성된 독창적인 한국 도성으로서의 위상과 형식을 갖추고 있다.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가 결합한 성곽 내부에 궁궐, 종묘, 사직과 행정시설, 시장시설, 거주지를 포함하는 한국적 도성체계와 축조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 600년의 역사층위가 축적된 유산
서울 한양도성은 문루와 성곽의 원형이 잘 남아있어 축조 당시 조선시대 도성 형식의 전통과 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길이가 18.627km로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유산 중 가장 큰 규모로 현재 12.854km의 구간이 원형 또는 복원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나머지 구간 가운데 일부는 지하유적으로 남아있다. 서울 한양도성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조선왕조의 수도로 도성의 형태와 기능을 유지해왔으며, 시기별 축조형태와 수리기술의 역사적 증거와 기록과 함께 실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 땅과 한 몸으로 구축된 문화유산
서울 한양도성의 입지는 풍수에 바탕을 두고 한반도의 지형체계를 고려하여 결정되고,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건설되었다. 석재로 축적된 성곽 안쪽에 판축층을 조성하는 등 지형과 일체화된 축조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성곽은 자연적인 지형을 활용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에 내사산 굴곡과 도성의 안팎이 함께 조망되는 뛰어난 도시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 집단 장인기술로 구축된 유산
한양도성은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성곽을 축조했는데, 구간마다 축조에 참여한 장인들의 실명이 새겨져 있다. 서울 한양도성의 보존을 위해 내사산의 지형을 잘 보존하여 왔고, 도성 안의 하천을 유지하기 위해 내사산의 수종들을 관리하여 왔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양도성의 문루와 성곽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과 도성 풍경을 묘사한 회화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한양도성은 한양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서울 사람들의 삶의 공간 중 하나로서 기능하였고, 신앙, 의례, 문예, 놀이의 장소였다.
2) 진정성(authenticity)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오백여 년 동안 수축과 수리의 과정을 통해 지속해서 관리되어왔다. 그 과정을 통하여 시기별로 구별되는 재료와 축조기술이 성곽의 형태와 디자인으로 드러나 있어서 오백 년의 역사적 층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지형과 일체화된 구조물로서의 존재 방식을 유지하고 있어서, 내사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성곽유산으로서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2008년 서울 한양도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숭례문이 방화로 부분 소실되었는데, 기존의 실측기록을 토대로 장인기술에 의하여 전통기법으로 복원되었다. 흥인지문과 더불어 도성의 성문 건축물의 원형과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 서울 한양도성은 내사산의 지세와 함께 잘 보존되어있어서, 성곽의 입지 및 제도, 성곽축성기술, 성곽시설 등이 잘 보존되고 있다. 현대 서울의 도심에 위치하고 있으면도 도성 경계로서의 역사적 가치와 장소적 의미가 잘 보존되고 있다.
3) 완전성(integrity)
서울 한양도성은 한국의 독창적인 도성형식으로 조성되었으며 규모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큰 성곽으로 전체 구간 중 약 70% 정도가 성곽의 원형 또는 유적형태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성벽과 더불어 성문·암문·수문·봉수대 등의 서울 한양도성을 구성하는 성곽시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서울 한양도성의 내부에는 도성을 구성하는 궁궐과 종묘·사직단 등의 주요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있다. 현재 한양도성은 국보와 보물, 그리고 사적으로 지정되어 국가문화재로서 관리되고 있으며, 철저한 고증을 거쳐 성곽의 잔존 및 훼손구간에 대한 지속적인 복원 노력이 진행되어 왔다. 서울시는 한양도성 종합보존·관리 및 활용 계획을 수립하고 한양도성을 세계유산의 관리지침에 부합하는 기준으로 보호하고 있다.
한양도성의 특징(구조 및 용어)
• 성벽
1395년(태조 4년)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성벽을 처음 축조할 때 산지와 구릉에는 석성으로 쌓았고 평지에는 토성으로 쌓았었다. 1421년(세종 3년)에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토성 부분을 석성으로 개축하는 등 대대적으로 고쳐쌓았다. 1704년(숙종 30년) 훼손된 구간을 정비하는 등 대규모로 수리하였으며, 영조 연간에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치성을 쌓는 등, 1869년(고종 7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개축과 수리를 통해 보강되고 관리되었다. 이에 구간에 따라 석재 형태와 구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수축 시기별로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첫 번째 유형은 14세기말 태조 때의 성벽으로, 화강암이나 편마암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큰 돌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으며 수직으로 쌓아 올려 거친 느낌을 준다. 동북면의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서북면의 평안도의 민정 118,070명을 동원하여 지역별로 97개 구간으로 축성구역을 나누어 쌓았다. 두 번째 유형인 15세기 초 세종 때의 성벽으로, 아랫부분은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로 쌓고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전국에서 322,400명의 민정을 동원하여 평지의 토성을 전부 석성으로 개축하고 성벽높이를 보강, 여장도 완비하였다. 개천이 빠져나가는 부분도 水門을 2간 더 설치하였다.세 번째 18세기 초 숙종 때의 성벽은 가로·세로 2척의 정방형 돌을 견고하고 치밀하게 쌓아, 성벽의 기울기가 일정하고 정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도성수축의 필요성에 논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다시 쌓고, 남한산성의 강화의 성을 보강하는 등 성역과 함께 진행되었다. 1704년(숙종 30년)에 시작하여 숙종 37년(1711)에 대규모의 도성수축공사가 마무리되었다.
• 성문(사대문과 사소문)
성문은 사대문과 사소문이 있다. 사대문은 유교에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사단(四端)의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동서남북에 각각 대응시켜 동대문을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을 숙정문(肅靖門)이라 이름을 붙였다. 사소문은 대문 사이사이에 배치하였는데,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 서남에 소의문(昭義門), 서북에 창의문(彰義門), 동북에 혜화문(惠化門), 동남에 광희문(光熙門)을 두었다. 현재 14세기말에 완성된 숭례문과 19세기에 새로 지은 흥인지문, 숙정문,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이 원형 또는 복원된 형태로 남아있다. 숭례문은 1396년(태조5년)에 상량하여 1398년(태조7년)에 완공되었다. 흥인지문은 서울성곽 성문 중에 유일하게 옹성(甕城)이 있으며 1396년(태조5년)에 창건하여 1451년(문종원년)과 1453년(단종원년)에 일부 보수가 있었고 그 후 1868년(고종5년)에 개축하였다. 숙정문은 원래 명칭이 ‘숙청문(肅淸門)’이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닫아놓았기 때문에 거의 성문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돈의문은 1396년(태조5년)에 세웠던 서전문(西箭門)을 1422년(세종4년)에 철거하고, 그 남쪽에 새로 옮겨 세운 문이다. 1711년(숙종37년)에 광희문과 함께 돈의문도 건립하라는 기록을 있어, 숙종 때에 재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 옹성, 치성, 곡성, 봉수대
흥인지문은 도성의 동쪽이 지대가 낮고 방어하기에 허술하여,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위한 목적으로 바깥쪽으로 옹성을 설치했다. 아울러 도성안의 물줄기가 흘러나가는 흥인지문과 광희문의 사이구간도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장방형 형태로 치성을 설치하였다. 실록기록과 옛 지도를 보면 5개의 치성을 설치하였는데, 현재 1개의 치성이 발굴되어 보존되어있다. 인왕산 정상부분에서 서쪽으로 돌출된 능선과, 백악과 응봉 사이에 북쪽으로 돌출된 능선에 각각 곡성을 두어 방어기능을 보강하였다.봉수대는 1394년(태조3년)에 설치되어 1422년(세종 4년)에 각 도의 봉수대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1438년(세종 20년)에 완비하였다. 밤에는 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서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1894년까지 지속되었다. 매일 전국으로부터 송신되는 신호를 최종적으로 목멱산 봉수대에서 수신하여 궁궐로 전송하였다. 서울 한양도성에는 목멱산에 총 5개소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현재 3봉수대로 알려져 있는 1개소만이 복원 되어있다.
• 수문
내사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개천으로 모여 동쪽으로 흘러나가는 자리에 오간수문을 설치하였으며, 그 남쪽으로 목멱산의 동쪽기슭에서 흘러내려온 물길이 흘러나가는 자리에 홍예문이 두 칸 규모의 이간수문을 설치하였다. 수구水口에는 운제 雲梯 운제雲梯 : 한양도성이 처음 건설된 1396년에는 운제雲梯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2월 28일(병진) (홍예雲梯 : 현재 일반적으로 홍예라는 이름으로 통용됨)를 쌓고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오간수문은 청계천 복원 당시 발굴조사를 통해서 유구가 발견되었으며 이간수문은 2008년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부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상부는 유실되었으나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발굴되어 현재 복원이 완료된 상태이다.
1) 운제雲梯 : 한양도성이 처음 건설된 1396년에는 운제雲梯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태조실록』 권9, 태조 5년(1396) 2월 28일(병진) (홍예雲梯 : 현재 일반적으로 홍예라는 이름으로 통용됨)
. 성벽의 구조
성벽은 크게 몸체 부분을 이루는 체성과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낮은 담장인 여장 으로 구분한다. 특별한 시설로 곡장과 치성, 성문과 문루, 옹성, 암문, 수문 등이있다.
체성; 성벽의 근본인 몸통을 이루는 부분이다.
여장; 성가퀴 혹은 성첩이라고도 한다. 체성 위에 올려진 낮은 담장으로 아군의 몸 을 숨긴 채 적을 총이나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하나의 여장을 ‘1타’라고 하며 1타에는 총안이 3개 있는데 가까운 곳을 쏘는 근총안이 가운데 있고 먼 곳을 쏘는 원총안이 양 옆에 있다.
옥개석; 여장 위에 올려진 지붕돌. 빗물이 체성으로 흘러드는 것을 방지하고 유사 시 지붕돌을 밀어 성 위로 올라오는 적병을 떨어뜨린다.
곡장(곡성); 성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굽어지게 쌓은 성. 서울 한양도성의 곡장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구간 두 곳에서 볼 수 있다.
치성; 성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각이 지도록 쌓은 성. 서울 한양도성의 치성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일부 복원돼 있다.
성문과 문루; 도성 안팎의 자유로운 왕래를 위해 설치한 문이 성문이고 체성 부분의 홍예 문 위에 올려 지은 누각이 문루다. 서울 한양도성의 성문에는 사대문과 사소문이 있고 한때 숭례문과 광희문 사이에 남소문을 건립해 서울 한양도성 의 성문이 아홉 개였던 적도 있다.
옹성; 성문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반원 모양 으로 성문을 에워싼 성이다. 서울 한양도성에는 유일하게 흥인지문에 설치 돼 있다.
수문; 성과 하천이 만나는 곳에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설치한 홍예문. 서울 한양도 성에는 흥인지문 옆 청계천에 오간수문이, 남산의 물이 흘러내리던 곳에는 이간수문이 있었다. 현재 오간수문은 원래 자리에서 조금 비껴서 1/2 크기 의 모형으로 남아 있고 이간수문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복원돼 있다.
암문; 비밀리에 군사를 이동하거나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만든 작은 문. 평소에 는 돌로 막아 두었다가 전시에만 사용하는 비밀 통로다. 현재 서울 한양도 성에는 모두 여덟 곳의 암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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